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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온샘의 독서 기록

살롱 드 경성(김인혜 / 해냄)

 

대한민국의 근현대는 알면 알수록 처연하게 느껴지는 쓰라린 역사이다.

잃었던 나라를 되찾고, 동족 간에 처절한 전쟁을 겪고, 독재정권에 맞서 피로써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급격한 산업화의 진통 속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쓰러져 갔으며, 최근에는 급격한 세계화와 고령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가 겪어 온 현실이다.

간략히 표현하기만 해도 이렇게 복잡하고 힘든 사회인데, 이러한 사회에서 예술이 태동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길 어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 한류 열풍이 세계 곳곳에서 일고 있고, 대중문화를 비롯하여 문화, 예술, 체육 전반에 걸쳐 활약하는 한국인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세계 지도에서도 겨우 찾고 찾아야 볼 수 있는 작은 나라,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에 속했던 약소국이 이토록 강한 문화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근대미술팀장으로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여 대중에 한국 근대 미술을 알려온 김인혜 님이 쓴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문화 영역에서 보이고 있는 저력의 뿌리를 캐내는 기분을 느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은 19세기말부터 1950년대까지 혼란의 개화기와 암흑의 일제강점기를 거쳐, 전쟁과 분단을 통과한 나라이다. 이 파란만장한 시대에 삶을 영위했던 인물들의 자취를 찾는 일은 매우 흥미로울 뿐 아니라, 진정한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힘든 삶 속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예술'에 사활을 걸었던 사람들이라니! 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책 없이 이런 일을 했던 걸까? 요즘 같은 '실리주의' 시대에 이들의 '낭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혼돈의 시대일수록 어둠을 뚫고 빛을 발한 인물들의 활약은 두드러져 보이게 마련이다. 한국 근대기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각자의 시련을 딛고 내면을 벼리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한 이들이었다. 세상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예술가끼리는 서로 자유롭게 연대하고 의지하며, 굶어 죽어도 '멋'을 유지했던 인간들이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정직함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높은 가치였기 때문에, 세속의 무가치한 경쟁과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실이 처절하게 고통스러웠기에 살아내기 위해서는 이를 분출해내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들이 바로 우리 근현대 예술가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끼와 자질이 질곡으로 가득 찬 현실을 만나 보석같이 빛나는 예술로 세상에 표출된 것이라고 말이다.

신체의 허기보다 정신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 때로는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물질이 넘쳐나는 최근의 현실을 보면 정신의 허기가 얼마나 사람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책의 시작점이 된 것은 김인혜 팀장이 2021년에 기획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전이다.

1930~40년대 경성을 무대로 펼쳐진 미술과 문학의 상호관계를 자료 기반으로 펼쳐보인 전시였다. 

이 전시를 글로 풀어 신문에 연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2021년 3월부터 조선일보 주말판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했다고 한다. 

미술사를 전공한 저자의  풍부한 식견과 한국인으로서 우리 역사에 대한 애틋한 마음, 예술가 역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따뜻한 시선을 버무려 우리 근대문화사를 증언하는 훌륭한 책을 펼쳐냈다.

30개의 꼭지마다 각각의 예술가가 살아낸 삶과 그 과정에서 잉태한 작품을 소개하는 내용을 읽다보면 샤흐라자드의 천일야화에 빠져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읽기 쉽게 풀어쓴 문장에서 저자가 예술가의 삶에 진실하게 다가서기 위해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공부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전체 4장, 30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화가와 시인의 우정-미술과 문학이 만났을 때'이다. 

문학가와 미술가가 절친한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은데, 시대별로 예술적 가치를 공유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2장은 '화가와 그의 아내-뜨겁게 사랑하고 열렬히 지지했다'이다.

이 부분은 화가의 아내로서 내조와 인내, 혹은 함께 예술을 공유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예술가라고 해서 생활인의 삶을 저버릴 수는 없다.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정을 일구며 살아갔던 예술가 부부의 삶을 읽으며, 나는 과연 이와 같은 사랑과 신뢰를 반려자에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부라는 관계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삶이라는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이자 동무로서 반려자가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장이었다.

3장은 '화가와 그의 시대-가혹한 세상을 온몸으로 관통하며'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픔과 고통으로 점철된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때로는 당차게, 때로는 처절하게 현실 앞에 맞서 싸우며 시대를 겪어낸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는 선구자의 뒷모습, 또는 쉽게 뿌리 내리지 못하고 허공에 떠다니는 슬픈 풀꽃을 볼 수 있다.

4장은 '예술가로 살아갈 운명-고통 속에서 만난 구원'이다.

예술가는 슬픔과 아픔을 숙명처럼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한 관념에 꼭 들어맞는 삶을 살아가며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알기 쉽게 풀어서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미술이나 예술, 인문학적 지식이 다소 부족한 사람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고2 정도의 수준이면 충분히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며, 문학, 역사, 미술, 도덕 등의 교과가 융합수업을 진행하며 주제 도서로 활용하기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다가 아픈 삶 이야기에 한숨을 몰아쉬기도 하고, 밀려오는 감동의 물결에 잠시 멍해지기도 하고, 나의 삶은 어떠한지 돌아보기도 하며 깊은 여운을 느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해야할 일을 미루고 싶거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 읽으면 수많은 예술가들로부터 잔잔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